예수께서는 걸림돌과 용서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남편을 깨우고 싶지 않아 나는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모르게 84파운드의 스탠다드 푸들이 내 침대 옆에 깔개를 말아 올렸습니다. 나는 걸려 넘어져 바닥에 부딪쳤다 – 세게. 나는 맥스가 카펫을 공격했을 때 나를 떨어뜨리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장난 때문에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꼬였습니다.

우리의 부주의한 행동이 사람들의 믿음을 걸림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걸림돌이 반드시 옵니다.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니라”(눅 17:1-2).

장애물이란 무엇입니까?
Blue Letter Bible은 장애물을 "오류나 죄에 빠지게 하는 사람이나 사물"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믿음을 넘어뜨리려고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행동이나 믿음의 부족은 다른 사람들을 오류나 죄로 이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신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 것에 대해 사도 베드로와 대면했습니다. 그의 위선은 충실한 바나바까지도 잘못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매 그가 정죄함을 인하여 내가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노라. 어떤 사람들이 야고보에게 오기 전에 그는 이방인과 함께 먹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자, 그는 할례파에 속한 사람들이 두려워 물러가서 이방인에게서 떠나기 시작하였다. 다른 유대인들도 그의 외식에 합세하여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미혹되었느니라”(갈 2:11-13).

베드로처럼 우리 자신에게 순응하거나 주의를 환기시키지 말라는 압력은 우리의 믿음의 가치를 타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은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다양한 의견과 의제에 시달립니다. 그 중 다수는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세상 문화에 순응하라는 압력은 강렬합니다.

때때로 나는 대중의 의견에 따르기보다 공개적으로 옳은 것을 옹호하는 사람을 볼 때, 모든 사람들이 금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서 있던 세 청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생각합니다(다니엘 3장). 그들의 저항은 그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지게 했습니다.

문화에 저항하고 신앙을 수호하려면 비용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흐름을 따라가는 것과 어린 신자들을 오류로 이끄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 더 많은 비용이 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니라”(눅 17: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광로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들의 기적적인 보호는 이교도 통치자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나 영원토록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범죄에 넘어지지 마십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후, 우리를 잘못 만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주제를 바꾸고 있었습니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 조심해. 네 형제나 자매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꾸짖어라”(루카 17).

동료 신자가 우리에게 죄를 지을 때, 예수께서는 그를 소홀히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꾸짖으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해야 합니까? 그분이 그들의 죄에 대한 분노와 수동적인 공모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또한 그 형제나 자매에게 회개할 기회를 줍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도 잘못을 범하고 있을 것입니다. 죄를 책망하면 둘 다 보호됩니다. 우리는 죄가 되는 행동을 허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 계속해서
“그리고 그들이 회개한다면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그들을 용서하라”(눅 17:3-4).

숫자 18은 종종 완전성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그들이 몇 번이나 잘못을 반복하더라도 우리가 계속해서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마태복음 21:22-XNUMX).

어떤 사람이 하루에 일곱 번 나에게 와서 “회개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예수께서 그들을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용서하라고 말한다.

용서는 "내버려두다, 그대로 두다"를 의미합니다. 또한 "빚을 탕감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빚진 종의 막대한 빚을 탕감해 준 왕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용서받은 종은 동료 종에게 적은 빚을 갚으러 나갔습니다. 그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하자 용서받은 채무자는 동료 종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당신은 이 사람이 자기에게 훨씬 덜 빚진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의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은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당연히 왕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많이 용서받은 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우리의 죄가 이렇게 큰 은혜를 받고도 작은 죄라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악하고 무서운 일입니다.

왕은 이 사람이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고문하도록 넘겨주었습니다. 마음에 비통함을 품어본 사람은 그 고문자들을 압니다. 그 사람이나 그들이 당신에게 어떻게 잘못했는지 생각할 때마다 당신은 괴로워합니다.

우리를 화나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의 잘못 때문에 넘어지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넘어집니다. 용서는 괴로움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보호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은 쓴 것이 많은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린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뒤에도 원한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그들을 죄로 이끄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우십시오
제자들은 당신과 나처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누가복음 17:5).

상습범을 용서하려면 얼마나 많은 믿음이 필요합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용서가 우리 믿음의 차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대상에 달려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라 하여도 너희에게 순종하리라”(눅 17:6).

아마도 그는 믿음의 겨자씨가 쓴 나무를 뽑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셔서 하는 것의 차이를 계속 강조하십시오.

“너희 중에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가 밭에서 돌아올 때 종에게 "이제 와서 앉아서 먹으십시오"라고 말할까요? 차라리 '나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나를 기다리십시오. 그 후에 당신은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 시키는 대로 했다고 종에게 감사할까요? 그러므로 여러분도 지시받은 일을 다 한 후에 이렇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합당하지 않은 종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루카 17-6).

종은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에 책임을 수행합니다. 종은 밭일을 마치고 피곤하여 굶주리고 돌아와도 주인의 잔치를 먼저 준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용서하는 것이 편해서나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가 그의 종이기 때문에 용서합니다. 우리는 주인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이렇게 합니다.

용서는 의무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순종할 더 큰 믿음을 갖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종하기로 선택하고 그분은 우리가 겪은 잘못을 떨쳐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타협의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자신을 조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애물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않도록 조심할 수 있습니다.